2화 / 120화
우산의 오른쪽
윤서는 우산 손잡이를 잡은 채 자동문 앞에 서 있었다. 비는 금방 그칠 것처럼 가늘었지만 바람이 세서 걷기 시작하면 어깨가 젖을 게 분명했다. 도현은 종이 묶음을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군가 먼저 함께 걷자고 말하면 어색해질 것 같았다. 결국 윤서가 우산을 조금 들어 보였다. “정류장까지 가시는 거죠?”
“네. 종이도 그쪽으로 갑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윤서는 웃었다. 도현은 우산의 오른쪽에 섰고, 종이가 젖지 않도록 가방과 몸 사이에 끼웠다. 두 사람은 보폭을 맞추는 데 몇 걸음이 걸렸다. 건물에서 큰길까지 이어지는 돌바닥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윤서는 평소처럼 빠르게 걷다가 도현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 도착 안내판에는 ‘잠시 후’라는 글자만 떠 있었다. 언제나 가장 믿기 어려운 시간 표시였다. 도현은 우산을 접으려는 윤서에게 잠깐만 더 펴 두자고 했다.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두 사람 바로 앞에 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옷이 젖는다. 멀리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경계였지만, 둘은 우산 하나 아래에 남아 있었다.
“오늘 회의요. 제가 말을 끊은 건 아니었죠?” 도현이 물었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덕분에 계산할 수 있었어요. 표를 외우고 갔는데 질문은 늘 표 밖에서 나오네요.” 도현은 예상할 수 있는 질문만 준비하면 누구든 당황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회의에는 빈칸이 있는 종이도 한 장 넣어 보자고 제안했다. 윤서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빈칸을 남겨 두는 사람이 되기는 늘 어려웠다.
버스가 도착하자 우산의 시간은 끝났다. 윤서가 먼저 탔고 도현은 뒤따랐다. 남은 자리는 통로를 사이에 둔 두 좌석뿐이었다. 앉자마자 서로 다른 창밖을 보게 된 것이 다행이기도, 조금 아쉽기도 했다. 윤서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회사 대화방에는 내일 아침 일정이 올라와 있었다. 확인 표시를 누르려는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도현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왔다. ‘종이는 무사합니다.’ 윤서는 옆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답했다. ‘복사기도 내일 아침까지 무사하길 바랍니다.’ 보내고 나자 바로 후회했다. 버스 안에서 굳이 메시지로 대화하는 두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바로 옆에 앉지 못한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도현은 창밖을 본 채 입꼬리만 조금 올렸다. 윤서는 그 옆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집에 도착해 젖은 우산을 현관에 세우자 종일 긴장하던 어깨가 내려갔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회사에서 받아 온 메모를 식탁 위에 펼쳤다. 예산표의 숫자 세 개가 적힌 페이지였다. 필요가 끝난 종이인데도 버리지 못했다. 윤서는 메모를 접어 책 사이에 끼웠다. 내일 업무에 도움이 될 자료라서, 라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붙였다.
다음 날 아침, 복사기 용지함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누가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서는 제안서 한 부를 시험 삼아 출력했다. 이번에는 걸림 없이 마지막 장까지 나왔다. 화면 옆에는 작은 점착 메모가 붙어 있었다. ‘오른쪽 덮개는 오늘 쉬는 날입니다.’ 글씨는 어제 노트에 적힌 것과 같았다. 윤서는 메모를 떼지 않고 그 아래에 짧게 적었다. ‘종이 담당자도 쉬어 가세요.’
점심 전까지 두 사람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 대신 복사기 앞을 지나는 동료들이 메모를 읽고 한마디씩 웃었다. 누가 쓴 것인지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윤서는 기계를 고치는 방법을 알려 주는 메모라고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현이 복사실을 지나갈 때 두 번째 문장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후 회의 자료를 가져가던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윤서의 책상에 놓였다. 따뜻한 보리차였다. “커피를 안 드시는 것 같아서요.” 도현은 그 말만 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윤서는 컵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꼈다. 실제로 그녀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어제 회의실에서 남들이 커피를 고를 때 혼자 물을 따른 것을 그가 기억한 모양이었다. 복사기 사용법보다 어려운 것은, 누군가의 이런 작은 관찰을 아무렇지 않게 받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