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20화
복사기 앞에서
월요일 아침, 복사기가 멈춘 시각은 정확히 여덟 시 사십칠 분이었다. 윤서는 급하게 출력한 제안서 열두 부를 기다리며 복사기 앞에 서 있었다. 회의 시작까지 십삼 분. 화면에는 종이 걸림이라는 안내가 떴지만, 어느 덮개를 열라는 말인지는 없었다. 그녀는 종이를 빼내려다 손끝에 검은 잉크만 묻혔다.
“옆면을 먼저 열어야 해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윤서가 돌아봤다. 새로 온 기획팀 팀장, 강도현이었다. 그는 출근 첫날부터 사무실의 복사기 구조를 아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덮개를 열었다. 사실은 어제 퇴근 직전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했다. 도현은 구겨진 종이를 꺼내고, 윤서가 다시 인쇄 버튼을 누를 때까지 덮개를 잡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오늘 첫 회의부터 늦을 뻔했어요.” 윤서가 말했다. 도현은 출력되는 첫 장을 받아 모서리를 정리했다. “저도 그 회의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늦을 뻔한 거죠.” 말끝에 작은 웃음이 붙었다. 윤서는 그 웃음보다 제안서 첫 장의 제목이 잘못 인쇄된 것을 먼저 봤다. 지난 금요일에 바꾼 이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모니터 앞까지 걸어갔다. 윤서가 파일을 열어 수정 날짜를 확인하는 동안 도현은 말없이 시계를 봤다. 여덟 시 오십일 분. 윤서는 새 파일을 찾아냈고 다시 인쇄를 걸었다. 기다리는 동안 도현은 이전 제안서의 첫 장을 반듯하게 접어 재활용함에 넣었다. 서두르는 사람 옆에서 조급함을 더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뜻밖에 든든했다.
회의실에서는 이미 커피가 식고 있었다. 윤서는 인쇄물을 나눠 주며 숨을 골랐고, 도현은 맨 마지막 자리에 앉았다. 발표 자료의 세 번째 화면에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왔다. 행사 장소를 바꾸면 예산이 얼마나 늘어나는가. 준비한 표에는 총액만 있었다. 윤서가 잠깐 말을 멈추자 도현이 노트 한쪽에 숫자 세 개를 써서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 숫자들은 정답이 아니었다. 다만 계산을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윤서는 표를 다시 설명하고, 확인이 필요한 부분은 오늘 오후까지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 다음 일정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노트를 돌려주려 했지만 도현은 이미 문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페이지 한쪽에는 작은 글씨로 ‘복사기 사용법: 오른쪽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윤서는 그 노트를 들고 기획팀 자리로 갔다. 도현은 통화 중이어서 책상 가장자리에 노트를 놓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팀 단체 대화방에는 오늘 회의가 잘 끝났다는 메시지들이 이어졌고, 누군가는 새 팀장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윤서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 오늘의 도움을 공개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과장될 것 같았다.
오후 네 시, 보완한 예산표를 보낸 뒤에야 윤서는 잠깐 숨을 돌렸다. 회신은 삼 분 만에 왔다. 숫자를 확인했다는 짧은 문장과, 회의 중 대답을 이어 간 방식이 좋았다는 한 줄이었다. 칭찬을 받은 것보다, 그녀가 당황한 시간을 도현이 눈치챘다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윤서는 답장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 “내일은 복사기를 혼자 고쳐 보겠습니다”라고 보냈다.
답장은 퇴근 직전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종이만 가져다드릴게요.” 윤서는 빈 사무실에서 혼자 웃었다. 우스운 것은 답장 내용이 아니라, 한 문장을 기다리느라 퇴근 준비가 늦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가방 깊숙이 넣고 불을 껐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오늘 하루를 떠올리는 순서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건물 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려는 순간, 자동문 옆에서 도현이 종이 한 묶음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복사실에서 가져온 새 종이였다. 그는 내일 아침에 채워 두려고 한다며 멋쩍게 웃었다. 윤서는 우산을 펼치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오 분. 둘이 함께 걸을지 묻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