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연애의 정석
3화 · 빈칸을 남겨 두는 법

3화 / 120화

빈칸을 남겨 두는 법

금요일 오전, 윤서는 다음 주 행사 계획표를 다시 만들었다. 완성된 숫자 옆에 빈칸을 한 줄 넣어 두었다. 현장 상황에 따라 결정할 일들을 적을 자리였다. 예전의 윤서라면 모든 칸을 채우고 나서야 파일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빈칸을 설명하는 문장까지 써서 도현에게 전달했다. 그는 몇 분 뒤 ‘이 칸이 제일 좋네요’라고 답했다.

행사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기획팀과 운영팀의 회의가 잦아졌다. 윤서는 같은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도현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드는 대신, 필요한 내용만 노트에 적었다. 그러나 복사기 앞에서 시작된 사소한 대화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회의 중 그가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괜히 펜 끝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점심 무렵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대관 장소에서 행사 당일 사용하기로 한 작은 방을 다른 단체에 넘겼다는 연락이 왔다. 발표자 대기실이 사라진 셈이었다. 담당자는 실수를 인정했지만 빈 방은 없다고 했다. 팀원들은 대안을 찾느라 전화를 돌렸다. 윤서는 계획표의 빈칸을 바라봤다. 바로 오늘을 위해 남겨 둔 자리 같았다.

도현이 가져온 건 건물 평면도였다. 지하 로비 뒤편에 평소 쓰지 않는 회의 공간이 있었다. 면적은 넓지 않았지만 의자와 거울을 놓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공간의 관리 권한이 다른 부서에 있다는 점이었다. 윤서는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사용 가능한 시간을 물었다. 상대는 주말 안에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확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찾아볼 방향이 생겼다.

“제가 너무 빨리 괜찮다고 말했나요?” 통화를 마친 윤서가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질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잖아요. 둘은 달라요.” 그 말을 듣고 윤서는 평면도를 다시 봤다. 종이 위의 작은 사각형 하나가 그날의 걱정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해졌다. 예산표의 숫자를 함께 보던 월요일과 비슷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윤서는 남아 연락 내용을 정리했다. 사무실 조명이 절반쯤 꺼지고, 청소 카트가 복도 끝을 지나갔다. 도현은 자기 자리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칸막이 두 개와 아직 답을 기다리는 일정표가 있었다.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사실로 갔다. 용지함은 이미 충분히 차 있었다. 그럼에도 뭔가 확인하고 싶어서 덮개를 한 번 열었다 닫았다.

도현이 복사실 문 앞에 나타났다. “오늘은 고장 안 났는데요.” 윤서는 괜히 용지함을 가리켰다. “예방 점검입니다.” 도현은 더 묻지 않고 옆에 섰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회사에서는 대개 빈 시간을 업무 얘기로 채우게 된다. 이번에는 아무도 새 안건을 꺼내지 않았다. 윤서는 그 짧은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지난번 우산, 감사했어요.” 도현이 먼저 말했다. 윤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종이를 지켜 드린 거니까요.” 도현은 종이는 사무실에 남겨 놓았고 실제로는 자기가 덜 젖었다고 했다. 윤서는 그런 사소한 사실을 굳이 바로잡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고맙다는 말 뒤에 다른 말을 붙이고 싶지만, 회사 복사실에서는 아직 적당한 문장을 찾기 어려웠다.

다음 버스까지 십오 분이 남았다는 알림이 휴대전화에 떴다. 윤서는 가방을 챙기러 돌아가면서 물었다. “오늘은 비 안 오던데, 같이 정류장까지 가실래요?” 도현은 한 박자 늦게 “네”라고 답했다. 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불 꺼진 자리들을 한 번 살폈다. 둘은 문을 잠그고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밖에는 비 대신 늦여름 바람이 있었다. 우산이 없으니 걸음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둘지 잠깐 고민하게 됐다. 윤서는 도현의 오른쪽에 섰다. 월요일에 그가 우산 아래 서 있던 자리였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오 분뿐이었다. 오늘은 그 짧은 길에 어떤 말을 담을 수 있을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빈칸은 필요한 만큼 남아 있어도 괜찮았다.